[점프볼=정다윤 기자] KBL 신인드래프트는 단 하루. 그 하루를 위해 살아온 시간은 수년. ‘25슬램게임’은 드래프트 지명과 KBL 무대 데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증명해야 할 의무를 가진 대학 농구 일원들의 생존기록을 담았다. 021번 참가자는 명지대 박지환이다.

#001_Scan. 021번 참가자: 박지환
부산성남초 재학 중 그는 단순히 학교생활만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환(고려대)이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 박정환은 이미 꾸준히 농구를 해오던 선수였고 두 사람은 같은 반 친구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쉬는 시간마다 함께 농구를 하며 점점 공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농구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던 그는 박정환의 권유로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직접 허진성 코치에게 박지환을 데리고 갔고 첫 만남에서 맞지도 않는 큰 유니폼을 건네받았다. 그 순간 그는 웃으며 새로운 시작을 직감했다.
“저한테 맞지도 않는 큰 유니폼을 주신 거예요(웃음). 부모님한테 전화번호 전달하고 집가서 유니폼을 보여드렸더니 ‘절대 농구 안 시킨다’고 하셨거든요. 그냥 한번 해보고 싶다고 계속 설득했더니 마지못해 허락해주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농구를 시작했어요.”
막상 농구를 시작해보니 쉽지 않았다. 공을 다루는 법조차 낯설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허진성 코치는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주며 그를 이끌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단지 친구들과 즐겁게 뛰며 농구를 배워갔다. 그중에서도 박정환은 특별했다. 초등학교 랭킹 1위라는 말이 돌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박정환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고, 동경이 점차 노력으로 바뀌어갔다. 게다가 김일모 코치는 늘 모든 일에 진심이었다. “운동이라면 미쳐보자”는 말처럼, 그는 선수들에게 열정의 한계를 끌어올리게 했다.
“금명중에 신입생으로 혼자 입학했어요. 예전에 한 번 운동을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낀 팀 분위기와 코치님의 지도 방식이 너무 좋았어요. 그냥 즐겁게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금명중을 선택했죠.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이제 내가 팀을 이끌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어요. 그때부터 농구를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실력도 많이 늘었어요. 코트를 보는 눈도 넓어졌고요.”
낙생고등학교 시절은 그의 농구 인생에서 가장 성장 폭이 컸던 시기였다. 1학년 때 전학 징계가 풀리면서 3학년 네 명 사이, 남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는 건 실력뿐 아니라 끈기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직접 경기에 나서고 형들의 플레이를 가까이서 보며 눈과 몸으로 배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박규훈 코치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코트 위 뿐 아니라 태도와 자세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좋은 평판 속에서 더 성장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자신이 성장의 궤도를 탄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고 회상했다.
“계속 가드로 뛰었는데, 코치님께 배운 가장 큰 점은 팀원들을 살리는 플레이였어요. 단순히 제 득점보다 팀 전체가 잘 움직이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죠. 그러려면 농구의 전반적인 BQ와 이해도, 그리고 모든 포지션의 움직임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그걸 제 장점으로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학년 때는 코로나로 대회가 거의 없었지만, 3학년이 되면서 정말 즐겁게 농구를 했어요. 특히 주변에서 예선 때는 ‘안양고에게 질 거다’라고 했지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번엔 우리가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조 1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어요.”
그는 고등학교 시절 백승엽(DB)과 함께 코트를 휘어잡던 기억을 꺼냈다. 둘은 경기마다 70점 안팎의 득점을 합작하며 상대를 압도했다. 그날 박지환은 38점 15리바운드로 경기장을 장악했다.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뛰었어요.” 말 그대로였다. 팀은 호흡이 완벽했고 분위기는 뜨거웠다. 경기장 밖에서도 서로를 믿는 관계가 농구의 즐거움을 더했다. 그러나 기세는 예기치 못한 부상 앞에서 멈췄다. 두 개 대회를 치른 뒤, 그의 발목 인대 세 개가 한꺼번에 끊어졌다. 가장 빛나던 시점이었기에 상실감은 깊었다.
“저랑 (백)승엽이가 팀의 메인 스코어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때 제가 다치면서 팀에 큰 부담을 줬어요. 팀원들에게도 정말 미안했고, 박규훈 코치님께도 죄송했죠. 그런데 코치님이 ‘괜찮다. 부상은 잠깐일 뿐이고, 네가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목표에 완전히 닿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잘 갈 수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많이 위로해 주셨어요. 그 말에 재활 열심히 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죠.“

#002_Life in University. (대학: 지명을 위한 1차 관문)
대학 무대에 오른 첫해 박지환은 14경기 평균 18.1점 5.8리바운드 4.3어시스트로 화려한 첫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진짜 농구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빛나는 농구가 아니라, 모두가 살아야 이길 수 있는 농구. 그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대학에서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1학년 때는 진짜 농구를 잘 못했다고 생각해요. 득점은 많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대학 와서 제일 크게 느낀 게 나 혼자 잘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더라도 팀원 네 명이 살아야 경기를 이길 수 있더라고요.”
그는 그 시절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뛰던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토대였다. 반성 속에는 긍정이, 후회 속에는 배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1학년 때 진짜 잘하지 않았냐’고 해요. 근데 저는 득점 잘했다고 농구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재밌게 하던 시기였죠. 그래도 그때 경험이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팀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는 2학년 때 흔히 말하는 ‘징크스’를 몸소 겪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체감할 정도로 기량이 떨어졌다. 10경기 평균 6.7점 3.1리바운드 2어시스트. 1학년보다 주춤했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해도 성과가 없던 그 시기, 자신감을 잃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 시기를 ‘농구를 다시 배우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조금씩 방향을 찾아갔다.
“김태진 감독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감독님은 프로에도 오래 계셨잖아요. 프로에서는 상대 팀에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비디오 분석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걸 저는 대학교 와서 잘 몰랐는데, 막상 1학년 때 했던 걸 2학년이 되니까 상대 팀에서 다 알더라고요. 그런 것도 있어서 플레이가 막히다 보니까 자신감이 너무 떨어졌어요. 정말 힘들었고, ‘이게 내 한계인가, 나랑은 진짜 안 맞는 건가’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2학년 때는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그때 저를 잡아준 분이 김태진 감독님이셨어요.”

감독은 이미 그의 슬럼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3학년에 들어서도 눈에 띄는 변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노력에 비해 경기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마음 한편에는 답답함이 쌓였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버텼다. 그 시기는 자신을 다잡는 법을 배우며 조용한 성장의 시간이 됐다.
“같은 걸 계속해도 안 되니까 ‘이건 진짜 나한테 아니다.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마침 황성인 코치님이 명지대에 오셨고, 감독님이랑 코치님 두 분과 면담도 많이 했어요. 그때 두 분 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은 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황성인 코치는 그에게 늘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가감 없이 짚어주는 사람이었다. “희생은 사랑이다.” 그의 마음에 오래 남은 황성인 코치의 한 마디였다.
“희생은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저한테 좀 크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저는 농구에서는 희생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제가 팀원들을 어떻게 살려줘야 되고 제가 죽더라도 팀원들 4명이 다 살게끔 해야 경기 이길 수 있다는 거를 코치님한테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코칭스태프의 조언으로 다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감독은 그에게 “사람 자체를 바꿔보자”고 말했다. 단순히 플레이 스타일이 아니라 태도, 마음가짐, 그리고 생활 전반을 바꿔보라는 의미였다. 운동에 임하는 자세부터 경기 전 집중하는 방법, 팀원과의 관계, 그리고 바깥에서의 생활까지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는 그 말을 계기로 3학년 말부터 변화를 시도했다. 농구에 완전히 몰입하며 ‘운동에 미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집중했고, 인성적인 부분에서도 스스로를 단련했다. 팀원들을 더 생각하고, 코트 안팎에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 노력은 4학년에 들어 주장이 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책임감은 더 커졌고, 팀을 이끄는 위치에서 ‘리더’로 성장해 있었다.
“4학년에 들어왔을 때 제가 주장이었거든요. 주장으로서 책임감이 확실히 컸어요. 그래서 항상 팀원들을 먼저 생각하게 됐어요. 저보다 팀원들이 우선이었고, 이 팀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까를 많이 고민했죠. 그러다 보니 제 운동할 때도 ‘뒤에서 팀원들이 보고 있는데 내가 한 발이라도 더 뛰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변화는 눈에 띄게 드러났고, 코칭스태프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며 변화를 인정해 주었다. 그 말에 자신이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노력의 흔적이 사람으로서의 성장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올해 역시 아쉬움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다크호스’로 불릴 만큼 명지대는 분명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건국대와 한양대를 꺾었고, 2025년 종별대회에서는 동국대와의 경기에서 20점 차로 앞섰다. 20점 6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주장인 그는 그런 순간마다 팀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래도 우리가 잘 해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15경기 평균 13.67점 4.47어시스트 5.87리바운드. 완벽하진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던 시즌이었다. 리더로서 선수로서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는 3학년 말에서 4학년에 들어갔을 때 저의 인생이 완전 바뀌었던 것 같아요.사람 자체가 바뀌었던 것 같아요. 제 터닝 포인트는 딱 거기죠.”

#003_Application. (드래프트 참여를 원하십니까?)
치열한 경쟁 속 자기 PR의 중요성 역시 더욱 커진다. 취업준비생인 드래프트 도전자들이 입사 희망 기업인 KBL 10개 구단에게 왜 다른 도전자들보다 자신을 선발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렇기에 ‘25슬램게임’은 각 도전자들에게 ‘1분 자기소개’의 시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한계가 없는 선수예요.”
“제가 지금은 잘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가진 것들이 너무 많아요. 장신가드인 만큼 볼 핸들링이나 넓은 시야나 트렌지션에서의 속공 처리도 자신 있어요. 제가 프로에 갔을 배워가면서 더 완벽해진다면 저는 한계가 없어요. 무조건 계속 성장해 나가는 선수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배우는 것도 자기의 능력이죠.
농구 이해도나 팀 전술 이해도에 대해 똑똑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고점이 높다고 생각해요. 프로에서 당장은 쓰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은 들겠지만 저는 1년 차로 더 큰 성장을 이뤄내고, 2년 차는 그것보다 더 큰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004_My Future (‘프로’농구 선수 박지환의 삶은?)
누구나 행복한 상상이라는 것을 해본 적 있지 않나. KBL 일원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드래프트 참가자들은 저마다 한 번씩 “내가 프로 선수라면?”이라는 행복한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프로 선수가 된 당신은 어떤 플레이를 펼치고 팬들과 동료들에게 어떤 칭호를 받는 선수가 되어있을 것 같은지에 대해 말이다.
“농구 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되죠. 저는 롤 모델이 확실하게 있었거든요. 소노 박찬희 코치님이요. 박찬희 코치님처럼 똑똑하게 농구하고 팀원들 잘 살릴 줄 아는 플레이를 하고 싶어요. ‘제2의 박찬희’ 소리도 들어보고 싶어요. 너무 존경하는 분이에요. 이번에 소노의 연습 경기를 하러 갔을 때요 박찬희 코치님이 제가 롤모델인 걸 아시더라고요.”
박지환을 만난 박찬희 코치는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장신 가드로서 지환이는 능력이 너무 좋다. 내가 못해왔던 걸 네가 하는 것 같다. 그 중 신장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면 포스트에서 백다운 공격, 포스트업을 해줄 수 있는 것. 자기 공격을 보면서 바깥으로 빼주는 부분. 그게 프로에 왔을 때 너무 큰 메리트다.”
롤모델의 말은 그를 더욱 성장하고 싶게 만들었다. 박지환은 마지막으로 “더 스마트하고 그냥 들이받는 스타일이 아니라 ‘저 선수 농구 되게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순간 선택이 빠른 가드요. 정말 다재다능하고 좋다는 말을 꼭 듣고 싶어요.”
박지환은 성장의 과정을 통해 농구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팀을 살리는 리더로 진화했다. 부상과 슬럼프, 자책의 순간마다 그는 포기 대신 변화를 택했고 그 경험은 지금의 단단한 박지환을 만들었다. 결국 그의 진짜 경쟁력은 성장의지다. 프로 무대에서도 그는 한계를 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선수고 앞으로가 기대된다.
#사진_박지환 제공, 점프볼DB